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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문예바다 서정시선집 10)
안영희 문예바다
8,000
책 소개

도서출판 문예바다가 어디로든 출구를 차단당한 길고 긴 이 코로나 시대에 독자들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리라 야심차게 기획한 우리 문단 유명 시인들의 서정시선집 그 열 번째, 안영희 시인의 『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가 출간됐다.
문예바다 서정시선집 기획자이며 시리즈물 표지 디자인까지 담당했던 안영희 시인의 시 세계는 이른 봄 보드랍게 고른 흙에 씨앗을 넣고 때맞춰 거름과 물을 주며 가꾼 정형화되고 예견된 꽃밭이 아니다. 지상의 꽃과 나무들이 정원에서만 피고 자라던가. 한 번도 시인이 되겠다고 꿈꿔 본 적 없던 시인은 마흔을 넘어서면서 어느 날 문득 저층의 뜨거운 용암과 불길을 내뿜기 시작한 화산처럼 시 작업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안영희 시인은 유년기와 성장기에 겪은 생의 결핍과 아픔들이 자리한 어느 아물지 않은 통점이 건드려질 때 시가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무심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산책길에 만난 개울가 자잘한 찔레꽃에서,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의 불빛들에서, 포도주를 담그면서, 질그릇을 빚으면서, 개 밥그릇을 보면서, 파도가 달려드는 모래톱에서, 병실 창밖의 혹한을 견디는 나목들을 내다보면서 시인은 인생의 질곡을 이제쯤은 한 발짝 물러나 관조하고 있다. 시인이 판독한 슬픔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것이 문득 독자들의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리라.


잠시 내 노래였던,
생애의 적막한 시편들을 흐르는 강물 위에 놓는다.
물결 따라 점점이 유등流燈이 되라고.
- 「시인의 말」


아무도 혼자서는 불탈 수 없네

기둥이었거나 서까래,
지친 몸 받아 달래 준 의자
비바람 속에 유기되고
발길에 채이다 온 못질투성이,
헌 몸일지라도
주검이 뚜껑 내리친 결빙 등판에서도
불탈 수 있네
바닥을 다 바쳐 춤출 수 있네
목 아래 감금된 생애의 짐승울음도
너울너울

서로 포개고 안으면
- 「모닥불」 전문


* * *

우리는 왜 온전히 타지 못했을까

컥컥 숨차고
목이 아파 울었을 뿐
아무리 애 태워도 매운 연기만 피어올랐다
그때는,
무엇이 되기엔 너무 이른
준비 없는 열정, 생나무 가지들이었을까

햇빛과 바람의 거리 알 수 없는 눈보라의 골짜기
천만 개 밤을 헤매느라
그 피 삭고 물기 다 말려

꽃처럼 아름답게, 꽃보다 처절하게
불로 피어나는 몸
- 「숯불」 전문


* * *

날 허락한 용문 행 기차
푸른 들판을 질러
덕촌2리 마을회관 앞까지
날 실어다 준 중원리 행 버스는
내 카드의 밥을 움푹 우움푹 덜어 먹는다
충전기에 카드를 넣으면
충전할 금액을 클릭하세요,
그러나 날 세상에다 내놓을 때
당신이 내게 충전한 금액이 얼마인지
나는 읽을 수 없고, 내 생의 잔량이 얼마큼인지
나는 가늠할 길 없으므로
살구꽃벚꽃매화꽃… 충전 탱탱한 생명들
꿈속처럼 천지간에 꽃잎 날릴 때에
혹은, 어느 깜깜한 밤 어느 낯선 비바람의 거리에
예비도 없이 나는 폐기될 것이다
빈껍데기가 되어

〈사용법〉
재충전 불가, 재생 불가함.

인 내 목숨은
한 장, 새로 발급하면 그만인 당신의
낱장 카드일 뿐이니까
- 「카드를 대세요」 전문


* * *

우리들의 눈물에다 색색 물감을 풀기 시작하는 당신
- 「봄」 전문


* * *

누가
지등紙燈을 걸고 있니
불 꺼진 기인 회랑에

누가 질주하다 넘어져 운
불과 바람의 사계 돌아봐, 돌아봐 하는 거니

부재인 듯 종일토록 머릴 박은
노동의 손을 씻으며
시나브로 지워지고 있는 이 저녁답

사람아, 나도 저 흰 꽃이고 싶다
가만한 향내 허기 지운 저 눈빛으로
문득 읽히고 싶구나

지친 귀로의 그대에게
- 「찔레」 전문


* * *

새벽 산길을 가네

덜 떨친 잠과
더께 진 미혹의 유리창,
내 영혼
햇푸성귀 잎사귄 양 헹궈 올리며
샘물 찰박대던 새소리들
들리지 않네

나무들 울울창창하던 때
새들의 시간, 하고 내가 이름 불렀던
바로 그 시간대인데

없네, 지금 저 숲에는 그 이쁜
새들의 기척이라곤 없네

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네
그대 떠나가 버린 빈숲,
우리가
그 누구의 생애에도
지, 나 가 는 철새임을 알지 못했네
- 「철새」 전문


* * *

저물녘 성북천 둑길을 따라 걷노라면 돌담벼락에 찔레장미 자잘한 꽃송이들이 시나브로 내리는 어둠에 점점이 얼굴을 묻고 피어 있다.
유월의 흐드러진 장미덩굴 아래거나, 무심히 타고 가는 지하철 안이거나, 강 물결 위에 셀 수 없이 꽃등이 떠가던 이국의 어느 손 시린 새벽할 것 없이, 내 시들은 일순 쏘이듯이 싸아, 숨어 있는 내 안의 어느 통점들이 건드려질 때 터져 나온다. ‘어디에 그런 구석이 있어?’ 사뭇 편해 보인다는 내 겉모습만으로는 전혀 짐작도 못할 그곳으로부터 발아하고 떡잎을 올린다. 얼마나 깊은지 전혀 가늠이 안 되는 켜켜의 밀폐된 어둠을 익히며 한참을 들여다보노라면, 몇 길 폐우물 아득한 바닥에서 반짝! 얼굴을 드는, 덜 마른 백 년의 환부 같은.
그리고 모든 예술을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물감색은, 슬픔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쉽게도 나가는 금, 어이없는 붕괴가
자재 자체의 결함 때문이었던 걸
그 오래 달려있었던 유일 자재, 사람이 바다모래였다는
답을 얻기까지
내 인생의 전성기를 다 허비해 버렸기로
입었던 옷 거기 벗어 두고……
나무 사람 집 바위…… 그 모든 부서져 온 파편들을
삽질했네, 물을 부어 아울러서
내 안의 넘치는 눈물 내 안의 솟구치는 분노
머리 푸는 바람, 질주 열망하는 바람을
가마 불에게 먹였네, 사람을 지었다는 저 본래의 재료
地 水 火 風에게로, 처음에게로
- 「파편들을 삽질하다 - 도방일기 6」 일부

세상살이에 유능해 사뭇 분주하고 유쾌한 사람들과 달리, 사람세상으로부터 비켜선, 흡사 면벽수행 같은 도예작업에 매료되어 무려 7년 동안이나 지상에서 뵈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는 동안, 흙과 불이란 본질의 한 세계가 수없이 나를 무릎 꿇리며 나를 길들이다가 어느 한 찰나,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는 뜨거운 발견자이게도 했다.
- 「서정抒情을 향하다」 중에서

저자 소개

안영희

시인

- 光州 출생
- 1990년 시집 등단
- 시 집 :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
『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내 마음의 습지』 『어쩌자고 제비꽃』
- 산문집 : 『슬픔이 익다』
- 〈흙과 불로 빚은 詩〉 도예개인전(2005년 경인미술관)
- 문예바다 문학상 수상
- https://youtu.be/0HaE_yXW7is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사람아, 나도 저 흰 꽃이고 싶다
찔레
철새
모닥불
막차를 기다리며
대답
나뭇잎들은 쓴다
지하도
벚꽃
풀베기
배롱나무 꽃
중세의 성
창천蒼天
들녘에서
함박눈 거리에서, 광주에게
겨울 서시
사하라
슬픈 꿈

제2부 아잔타 가는 길
간이역
모래톱
숯불
사과
봄 둑
목련나무 아래서
카드를 대세요
사월 수채화
사랑의 기쁨
초원에서
웬 미친 여자를 보았어요
짧은 사랑노래
시월
포도주를 담갔다
진홍빛 기억 언저리
슬픔이 익다
아잔타 가는 길

제3부 휘파람을 날리며 밟고 지나가고
저 햇살길 따라서 가면

언덕 위에 있다 - 도방일기 1
아니면 모레쯤 눈이 내리리라 - 도방일기 5
무장해제 - 도방일기 7
휘파람을 날리며 밟고 지나가고
그때 못 쓰던 詩, 서울역
하얀 풀꽃 밭이었니
맺힘, 저 저린
풀색 풀무치 한 마리 있지
그리고 가을입니다
우주의 문장
뜸이 드는 저녁
가을이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가는 저녁
어미가 울고 있네

제4부 초록 참회록
초록 참회록
손, 반역

불현듯 왔다 가는 이별이십시오
겨울일기 1 - 나무
겨울일기 2 - 꽃가게

태풍주의보
비누
진달래
사랑이 아니고 이별입니다
범종梵鐘이 운다
갈대가 아니어라
손가락 열 개의 판화, 까미유 끌로델
제야에

서정抒情을 향하다 ㆍ 통점으로부터 발아하는 시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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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