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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 극소
베르너 하마허 문학과지성사
14,000
책 소개

“문헌학은 묻는다, 세계를 손수 파낸다”

“문헌학이라는 이름은 로고스─언설, 언어 혹은 공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호의, 우정, 사랑을 뜻한다. 이 명칭에서 필리아에 해당하는 부분은 일찍이 망각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문헌학은 점차 로고스학, 즉 언어에 관한 학문, 다시 말해 박학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언어 자료, 특히 문헌 자료를 다루는 학문적 방법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헌학은 지식의 언어보다 앞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먼저 일깨우는 운동, 그리고 [기존의] 인식 속에서 [정말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제기하는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다.” (17쪽)

그렇다면 문헌학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문헌학의 특성과 대상 등에 관한 명제를 부단히 제시하지만 문헌학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문헌학은 주어진 언어를 넘어서는 말하기의 불안정한 운동이다. 문헌학은 통용되는 규정에 저항하고 질문한다. 만약 문헌학이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계속 질문하기 위함이다. 질문하기 속에서 모든 확실성은 언어에 내맡겨지며, ‘언어’와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 때문에 언어는 척도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척도를 찾을 수 없는 문헌학은, 횔덜린의 언어가 그렇듯 자유로운 리듬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슐레겔의 표현대로 “모든 선을 끊고, 모든 원을 폭파하며, 모든 점을 뚫고, 모든 상처를 찢는” 것이 문헌학적 실천의 길이다. 즉 규정된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 해도 결국 문헌학은 비-규정한다. “문헌학이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때 느끼는 당혹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구원적 규정을 기대하는 여느 분과학문이 으레 한 번씩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또 결코 알 수 없기에 느끼는 당혹감, 바로 이것이 문헌학”이라는 말 또한 이 맥락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틈새 없이 촘촘한 설명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오히려 논리를 마비시키는 것, 언어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명석 판명하고 질서 정연한 언어를 향하는 대신, 서로 분절되어 있고 열려 있는 가능성을 문헌학의 본령으로서 사고한다. “문헌학은 우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간격의 반복이다. 모든 앞선 말로부터 자신의 말을 분리하고 또 이 말을 다시 그것보다 앞선 말로부터 분리하는 간격. 문헌학, 이것은 언어에 대한 극진한 사랑 속에서 우선 언어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200쪽).
“끝없는 질문의 수렁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헌-문헌학자의 일이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고, 어떤 것도 바라는 대답이 될 수 없음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면서도 기어이, 기꺼이, 부답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헌학의 일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자는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이 진술에 눈곱만큼의 역설도 수수께끼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선연히 실감한 자는 이미 문헌학자라고 할 수 있다. ‘무엇-질문’에서 ‘어떻게-질문’으로의 이행을 포월하여 마침내, 어느새, ‘질문 -질문’에 도달한 것이므로.” (「옮긴이 해제」에서)

저자 소개

베르너 하마허
Werner Hamacher (1948~2017)
독일 최초로 비교문학과를 창설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당대를 풍미한 문학이론가 페터 손디의 지도 아래 횔덜린 시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자크 데리다의 초청을 받아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76년 헤겔의 청년기 저작 『기독교의 정신』을 편집·출간하면서 일종의 주석으로 집필한 논고 「충만: 헤겔의 독서 개념에 대하여」를 베를린자유대학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던 폴 드 만은 “단순한 헤겔 주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1984년부터 존스홉킨스대학 독문과와 인문학부에 재직하며 피터 펜브스, 게르하르트 리히터, 대니얼 헬러-로즌 등의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냈고, 1998년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옮겨 가 비교문학과를 창설했다. 스위스에 위치한 유럽대학원학교의 에마뉘엘 레비나스 교수직을 겸했으며, 2003년 이후 비정기적으로 뉴욕대학 독문과에서 방문 석좌교수로 일했다. 자크 라캉의 『세미나』와 폴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를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1993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스탠퍼드대학 출판부에서 간행하는 〈자오선: 횡단하는 미학〉 총서 책임 편집자로 활동했다. 2000년 이후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변별되는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면서 ‘문헌학’의 이념에 깊이 천착했으며, 이 노력은 『문헌학, 극소』를 통해 하나의 작은 결실을 맺게 된다. 이에 하마허의 제자와 친구들은 합심하여 2019년 『언어를 주기: 하마허의 문헌학을 향한 95개 테제에 대한 응답들』이라는 논문집을 펴냈는데, 거기에는 하마허의 장대한 답변도 함께 실려 있다. 그의 많은 유작 가운데 『언어정의Sprachgerechtigkeit』 『함께 없이 함께Mit ohne Mit』 『단 한 번도 한 번에Keinmaleins』 『남아 있는 할 말Was zu sagen bleibt』 등이 출간되어 있다. 절친한 벗이었던 철학자 장-뤽 낭시는 그를 이렇게 추모했다. “하마허는 [하찮은] 벌레 앞에서 몸을 굽히는 강력한 거인이다.”

목차

조효원
서양인문학자, 번역가, 문학비평가. 성균관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발터 벤야민의 초기 언어 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독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유럽어문학부에서 방문학생으로 수학했다. 미국 뉴욕대학(NYU) 독문과에서 바이마르 정치신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유럽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부서진 이름(들): 발터 벤야민의 글상자』 『다음 책: 읽을 수 없는 시간들 사이에서』가, 옮긴 책으로 조르조 아감벤의 『유아기와 역사』 『빌라도와 예수』,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 대니얼 헬러-로즌의 『에코랄리아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2』 『정치적 낭만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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